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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보도자료

    한국장로신문 : 오직 예수의 사람, 香山 한영제 장로, 그 삶과 신앙1-3

    • 관리자
    • 2011-01-27 오후 8:2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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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예수의 사람, 香山 한영제 장로, 그 삶과 신앙(1)
    [[제1255호] 2010년 12월 11일] 조회 : 71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운 어른

    그립다. 참으로 그립다. 어른이 그립다. 참으로 어른이 그립다. 참 어른이 그립다. 그냥 나이 많은 노인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존경심이 우러나와 그 이름만 들어도, 머릿속으로 그 모습만 그려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그런 어른이 그립다. 뭘 해서가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로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어른. 미소 짓고 서 있는 그분 앞에 서기만 하면 마음 속 번민과 갈등이 저절로 해소되며 용기를 얻고 삶의 현장으로 달려가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어른 말이다. 그런 어른이 이다지도 그리운 것은 그런 어른 몇 분만 있다면 오늘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이처럼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의 근원은 무엇일까?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본래 기능에 충실하지 못하고, 목사가 목사답지 못하고, 장로가 장로답지 못하다는 세간의 비판과 비난을 ‘남 탓’으로만 돌릴 것인가? 교회 안팎의 많은 학자들은 오늘 한국교회가 당면한 위기의 근본 원인을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 상실에서 찾는다.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는 세속적인 지도자들의 그것과 달라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영적’ 권위라 표현한다. 세속적 권위가 돈과 권력, 명예와 지식 같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영적 권위는 그 출발부터가 다르다. 그것은 세속 영역 너머에서 일어나는 초월적 종교체험, 그리고 그것에 바탕을 둔 신앙과 신념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윤리적 갱신과 모범적 도덕생활, 이러한 종교와 윤리 영역에서 영적 권위는 확보된다. 이런 영적 권위를 지닌 종교 지도자들의 말씀에 난마처럼 얽힌 현실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가 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참 어른이 그립던 차에, 2년 전에 훌쩍 우리 곁을 떠나 하늘 본향으로 옮겨 가신 향산(香山) 한영제(韓永濟) 장로님의 삶과 신앙의 궤적을 훑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미 잘 아는 사실이지만 향산은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이자 지금까지 유일한 ‘평신도 총회장’이란 역사적 기록을 갖고 있다. 그리고 지난 1998년 가을, 경주에서 개최된 전국 장로회연합수련회에 참석했던 4천여 명의 장로들은 주최측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생존자 중에 가장 존경하는 장로’로 향산을 선정했다. 그만큼 향산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장로’로 인식되었다(향산은 자신이 그런 인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것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변에서 이를 축하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리를 애써 피하곤 했다).
    그런 향산과 가볍지 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나에게는 ‘하늘의 은총’이었다. 1979년 대학원을 졸업한 직후 직장 삼아 기독교문사의 《기독교대백과사전》 편찬실에 들어가면서 시작된 30여 년의 관계 속에서 향산은 나에게 단순한 직장 상사가 아니라 신앙과 삶에서 아버지와 같았던 ‘큰 어른’, ‘참 어른’이셨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향산을 만났고, 그와 사귀고,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그러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예수님을 옷 입고 사신 분. 온유 겸손하셔서 대인관계에서 전혀 무해(無害)한 인물. 안심하고 믿어도 되는 사람이었고 일생동안 남에게 화를 내거나 불쾌하게 대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항상 낙관적인 사고방식으로 사람을 감싸주고 위로·격려해 주신 분. 생각과 말과 행함이 예수를 본받아 사신 분.”(림인식 목사)
    “천성적으로 온유한 어른. 한 번도 음성을 높이거나 얼굴을 붉히시질 않았다. 항상 자신의 말씀을 하시기보다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신 분. 모든 의견을 다 들으시고 난 후 결론은 간단했다. ‘여러분의 의견을 존중해서 저도 따르겠습니다.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장로로서 우리 교단 총회장이 되셔서 존경받으신 것도 그러한 온유함에서 모든 이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본다.”(김순권 목사)
    “순리를 따르시는 분. 계단을 건너뛰지 않고 차근차근 오르시는 분.”(박종구 목사)
    “항상 넉넉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품고 또 용기를 주신 분. 그래서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그분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나곤 했다.”(계준혁 장로)
    “그 깊이는 바다 같고 그 높이는 산보다 높아서 많은 신앙인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이고 감동을 주신 분.”(정영록 장로)
    “마지막까지 경건, 절제, 봉사생활을 실천하시며 한국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의 삶을 모범으로 보이시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향기를 나타내셔서 우리 장로들에게 여러 면으로 큰 본을 보이신 분.”(정승준 장로)
    “어떤 경우에도 넘치거나 흐트러지는 법이 없는 법도와 품격을 지닌 분. 당신이 할 일은 결코 그 누구에게도 맡기거나 부탁을 하지 않고 직접 챙기시고 확인을 한 후 끝맺음을 분명히 하시는 분.”(노석조 장로)
    “원만하고 통 큰 성품과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강한 흡인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어려운 문제도 쉽게 풀어가는 특유의 카리스마를 지닌 분. 또한 언제 어떤 자리에서나 목회자를 잘 섬기는 모범을 보이신 분.”(유호귀 장로)
    “늘 넉넉하셨고 삶에 여유가 있었으며, 성도의 생활에서 온유와 겸손을 실천하신 분. 결코 앞서지 않으시고 뒤에 서 계시면서 앞서 일하는 분들을 도우시며 언제나 일이 되도록 이끌어주셨던 분. 그리하여 마태복음 5장 5절의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을 솔선수범 실천으로 보여 주신 분.”(이만열 교수)
    “호처럼 항상 그리스도의 냄새가 뿜어져 나와 누구에게나 따뜻한 손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시던 분.”(임희국 교수)

    향산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고, 그에게 도움과 은혜를 입은 사람도 많고, 그와 함께 일해 본 사람도 많고, 따라서 그에 대한 증언도 다양하지만, 이 모든 기억과 증언들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향산, 그는 참 믿음의 사람이었다.” 참 믿음으로 살았기에 큰 어른이 될 수 있었던 향산. 그의 삶과 신앙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오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장로] 오직 예수의 사람, 香山 한영제 장로, 그 삶과 신앙(2)
    [[제1256호] 2010년 12월 18일] 조회 : 65

    자랑스러운 고향교회, 조상들의 믿음


    한영제 장로의 호 ‘향산’(香山)은 그의 고향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1925년 6월 4일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 사기면(沙器面) 향산동(香山洞)에서 출생했다.
    그는 회갑을 넘겨서야 ‘향산’이란 호를 썼는데, ‘향기로운 산’이란 성서적 의미(아가8:14)에서도 좋아했지만 향산이 ‘꿈에도 못 잊을’고향 마을이기에 더 애착을 가졌다. 그런데 그가 태어난 향산동은 다른 토박이 말로 ‘새당거리’라 불렸다. 한문으로 신시동(新市洞)이라 썼는데 마을 한가운데 ‘새 장거리’가 조성되면서 생긴 이름이다. 그가 태어난 마을은 사방이 산들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평안북도 산골 마을로서 높은 고개를 넘어야만 구성과 선천, 의주로 나갈 수 있는 분지였다.
    향산의 집은 그런 중에도 조선시대 여진족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돌성인 동고성(東古城) 안에 있었다. 이런 식으로 향산은 남산마루의 성안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산 위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꿈을 키웠다. 바로 이런 산골임에 기독교 복음이 일찍 들어와 새당거리에 신시교회(新市敎會)가 설립되었다. 향산은 자신이 신시교회 출신인 것에 자부심이 남달랐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1926년)에 의하면 1895년 창립된 신시교회는 평북에서는 의주읍교회 다음으로 세워진 교회로서 선천북교회보다 1년 앞서 설립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교회는 한국 초대교회사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의주출신 김이련 조사와 양전백 목사, 김관근 목사 등이 설립하였는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이원익(李元益) 목사와 윤하영(尹河英) 목사 등이 시무했고 해방 전까지 최준극(崔俊剋)·공성택(孔聖擇)·허두칠(許斗七)·김준응(金峻應)·김관규(金寬奎) 목사님 등이 담임했다. 특히 신시교회에는 원희태(元禧泰)·원대득(元大得) 부자(父子) 장로와 백일현(白日現) 장로 등이 유명했는데 그중에도 원대득 장로는 이미 일제강점기 때 독일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로서 신시교회뿐 아니라 일반 사회의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향산은 이런 신시교회의 ‘모태신앙인’으로 출생하였다.
    해방 직후 혹은 전쟁 때 월남했던 대부분의 실향민들이 그러한 것처럼 향산도 해방 직후 급하게 월남하는 바람에 족보나 자료를 챙기지 못해 조상에 대한 정보나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어렵다. 그래서 향산은 어린시절, 단편적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통해 전해 들은 집안 내력을 대략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나의 본은 청주(淸州)다. 먼 옛날, 우리 직계 조상이 고향인 청주를 떠나 평안북도에 들어와 ‘짐을 부린 곳’이 의주군 고령삭면 천마동이었다고 한다. 거기서 몇 대인가 살다가 나에게는 증조부 되시는 택선(宅善) 할아버지 때에 세 형제를 분가시키셨다고 한다.
    세 형제 할아버지가 곧 득룡(得龍), 득정(得禎), 득봉(得鳳) 할아버지다. 득룡 할아버지가 평양신학교 3회 졸업생이시다. 양전백(梁甸伯)·김관근(金灌根)·한석진(韓錫晋)·서경조(徐景祚) 목사님들과 같은 연배 분으로 의주군 창사교회, 천마면 천마교회를 창설하셨고 신학교를 졸업하신 후에는 함남 일대에서 선교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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