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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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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보도자료

    요셉의 꿈을 살았던 문서선교사 - 고 향산 한영제 장로(한국기독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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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의 꿈을 살았던 문서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이덕주목사감신대 교수/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부관장


    향산 한영제장로의 평생 '본업'이었던 기독교 문서운동과 문화선교의 꿈은 이미 어린시절부터 배태되었다. 교통이 불편한 산골이었지만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여 평안도에서는 의주읍교회 다음으로 설립된 구성군 신시교회의 3대째 신앙가문에서 출생한 향산은 주일학교 시절, 교회 마당에 있던 '과부교인' 기념비를 보면서 '요셉의 꿈'을 키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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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의 한영제장로(오른쪽)와 함께 한 필자 이덕주목사(왼쪽).
     
    향산은 평생 모은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여 목회자 생활을 돕고 유치원을 설립했던 함실녀, 이득하 두 과부교인 이야기를 들으며 '재물을 선하게 쓰는 법'을 가슴 속에 새겼다. 그리고 청년시절이던 일제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시교회로 피신해 와 있던 교회사학자 김양선목사(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설립자)에게 신앙지도를 받았는데 김 목사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수집한 독립운동과 초기 교회사 관련자료를 토담 벽과 지붕 속에 숨겨두고 자식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면서 역사적 유물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향산도 교회목회의 꿈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해방직후, 선천의 평북노회 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한 것은 해방된 조국에 가장 필요했던 복음전도 사역에 헌신하여 한국교회 초대목사였던 큰 할아버지 한득룡목사의 대를 잇겠다는 소명감때문이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공산화된 북한 현실은 그로 하여금 신학공부에 전념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1947년 7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한 향산은 그 시절 월남 실향민들이 그러했듯 극빈의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그것은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그런 중에도 "교회 중심으로 살겠다"는 신앙의지만은 굽힌 적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1955년 5월, 피난민들이 세운 대구평북교회(현 남성교회) 당회장 이성호목사와 정학선장로, 정영록집사 등이 기독교 문서운동을 내다보며 서점 정문사를 설립하고 향산에게 그 관리를 맡겼다. 향산이 문서선교사로 발을 내딛게 된 동기다. 정문사는 후에 서울로 자리를 옮겨 서점과 출판사를 겸한 기독교문사로 발전하였다. 고향을 떠난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 감옥 밑바닥까지 갔다가 거기서부터 축복의 삶이 시작되었듯, 향산의 꿈도 피난지에서 현실로 이루어졌다.
    향산에게 문서사역은 '목회'였다. 비록 신학을 중퇴하였지만 기독교 서적을 출판, 보급함으로 교회와 신학교 강단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으로 목회 소명을 감당하고자 노력하였다. 시련과 유혹이 있었음에도 한 눈 팔지 않고 올곧게 기독교 문서출판과 보급을 고집한 것은 이런 '문서 목회'에 대한 책임감때문이었다. 서점이 그의 교회였고 고객은 신도였다. 향산은 당장 돈 되는 쉬운 책보다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데 이해타산 때문에 손을 대지 않는 신앙과 신학의 기본도서, 단행본보다는 주석과 사전류의 대형 출판물을 기획, 출판하였다. 기독교문사의 첫 출판물인 '세계인명대사전'을 비롯하여 '바클레이신약주석'(17권) '매튜헨리성서주석'(45권) '베이커성경주석'(54권) 등을 거쳐 1985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비로 일컬어지는 '기독교대백과사전'(16권)이 그렇게 해서 나왔다. 이런 과정을 통해 향산의 인격과 지도력은 확대되었고 마침내 1992년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로 '평신도 총회장'이 되었으니 이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것과 같은 영광이자 은총이었다.
    향산은 입버릇처럼 "나는 빚진 자"라 하였다. 그는 늘 "내가 문서 선교에 참여하게 된 것부터가 이성호목사의 부름과 신앙동지들의 투자에서 비롯된 것이고, 기독교문사가 이처럼 성장, 발전한 것도 우리를 믿고 책을 사준 독자와 교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면서 교회로부터 받은 은혜를 교회에 되돌리는 일을 남은 사명으로 여겼다. 그런 배경에서 1985년 사회복지법인 한나요양원을 설립하여 1백여 무의탁 노인들을 '북에 두고 내려온 부모님처럼' 섬기며 살았고, 2001년에는 평생 모은 10만여 점의 교회사 관련 귀중자료를 한국 교계에 헌납하는 심정으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을 설립, 그 기초를 닦는 일에 마지막 혼을 불살랐다. 그것은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했던 향산의 고향교회 '과부교인' 기념비와 교회사 유물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던 교회사학자 김양선목사로부터 배운 교훈의 실천이었다.
    향산의 마지막 작품은 작년 가을, '평양 대부흥운동 1백주년'을 기념하여 1907년 부흥운동의 발상지인 평양 장대현교회를 이천 박물관 경내에 복원 설립한 것이다. 향산은 이를 통해 초대교회 부흥을 일궈냈던 순수한 복음열정과 한국교회의 처음사랑이 회복되기를 기원하였고, 평화 통일이 속히 이루어져 모형이 아니라 온전한 형태로 북한 땅에 교회가 복원되기를 바라는 '새 예루살렘의 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살아남은 우리의 과제가 되었다. 마치 요셉이 애굽에서 눈을 감으며 "내 시신을 이곳에 묻지 말고 언젠가 들어갈 우리 조상들의 땅에 가져다 묻으라"(창50:25)고 유언한 것과 같이, 한 평생 문서선교를 통한 복음전도와 기독교 문화창달을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소명으로 알고 살았던 꿈의 사람 한영제장로도 우리에게 지켜야 할 약속을 남겨두고 떠났다.
     
    입력 : 2008년 08월 13일 18:58:34 / 수정 : 2008년 08월 13일 18:5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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