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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장로신문] 오직 예수의 사람, 香山 한영제 장로, 그 삶과 신앙(4)

    • 관리자
    • 2011-01-27 오후 8: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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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장로신문] 오직 예수의 사람, 香山 한영제 장로, 그 삶과 신앙(4)
    [[제1259호] 2011년 1월 15일] 조회 : 11

    만주 유랑생활, 그리고 결혼


    “이대로 살 것은 아니다.”

    향산이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우체국에 취직해서 1년 정도 일을 하고 난 다음 든 생각이었다. 일에는 보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었다. 더욱이 그 무렵 일본은 상해를 침공해서 소위 중일전쟁을 일으켜 한반도 청년 학생들이 ‘징병’ 혹은 ‘징용’의 공포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던 때였다. 향산의 형들은 우체국 정직원으로 있었기에 이런 공포에서 면제될 수 있었지만 임시 고용원이었던 향산으로서는 언제 불려나갈지 모르는 불안 속에 하루하루 살았다.

    바로 그때 만주 봉천(현재 심양)에 가 있던 고향 친구 원효길로부터 “봉천에 와서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편지를 받고 만주행을 결심하였다. 10년 전 빚 때문에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가서 살았던 경험이 있던 부친도 향산의 봉천행을 말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1939년 봄, 열다섯 나이로 향산은 압록강을 건넜다. 그러나 만주 생활은 고향보다 더 지독한 가난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고향 친구 원효길의 사정은 국내에서 생각했던 것과 딴판이었다. 친구의 도움을 받을 형편이 못된 향산은 하숙비도 못내 하숙집에서 쫓겨나 기차역에서 자기도 했고, 교통비가 없어 걸어서 봉천시내를 걸어 다니기도 했다. 점심 굶기는 예사였다.

    어렵사리 구한 직장 봉천교통주식회사 남팔조 영업소에서 운전수 조수 노릇도 해 보았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봉화상사에서 자전거로 물건을 배달하는 일도 했다. 말 그대로 막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밑바닥’ 생활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고난이었지만 향산은 타고난 근면과 성실로 2년 후에는 어느 정도 안정적 기반을 이룩할 수 있었고 고향에도 적지 않은 돈을 부칠 수 있는 형편까지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안정이 그에게 모든 것이 아니었다. 그는 또 다른 문제로 심각한 위기 위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것이었다.

    “일제시대 부흥사 목사님들이 흔히 하시던 말씀이 있다. 기차를 타고 압록강 철교를 지나 만주로 들어가다 보면 철교 난간에 종이쪽지들이 너덜너덜 붙어 있는데 직업 안내, 사람 찾는 호소문, 정부에서 붙인 공고문 등이었다. 그런데 부흥 목사님들은 그것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었다. ‘압록강 철교에 붙인 종이쪽지들은 만주 가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드리는 편지 쪽지들이외다. 뭐라고 썼느냐 하면, “예수님, 잠깐만 여기 계십시오. 갔다와서 뵙겠습니다”는 내용이올시다.’ 만주 가는 사람들은 신앙을 국내에 두고 간다는 말이었다. 그만큼 만주 생활은 비신앙(非信仰), 무신앙(無信仰) 생활의 유혹이 강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만주에 가 보니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더욱이 나로서는 운수회사 기숙사에 있는 동안 엄격한 규율 때문에 교회에 다니기도 어려웠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무절제한 생활에 영향을 받아 타락하기 쉬운 위기에 처했다.”

    일제 말기 시국이 어려웠던 것처럼 향산의 신앙생활도 위기였다. 주일학교까지는 열심히 다녔으나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직장(우체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교회 출석이 뜸해졌고 만주로 온 후에는 교회 출석은 물론 기도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형편에서 밑바닥 사람들과 생활했다.

    외지 ‘밑바닥’ 생활에서 오는 유혹과 시험은 10대 후반 향산에게 넘기 힘든 장애물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국은 점점 험악해져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는 소위 ‘태평양전쟁’(1941년)이 일어났고 도시에서는 소개가 시작되었으며, 조선 청년들은 전쟁터에 끌려나가 희생 제물이 되었다. 하루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불안과 절망의 나날이었다.

    그러던 중, 고향 집에서 연락이 왔다. “신부감이 있으니 들어와 선을 보고 가라”는 것이었다. 부모님 말씀이라 고향에 돌아와 보니 신부감은 같은 신시교회 교인인 고씨네 집 딸이었다. 처가 집안도 오래전부터 믿는 집안이어서 신부감을 교회 주일학교에서 만난 적은 있었으나 부부로 연결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었다. 이미 양가 어른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진 상황이고 또 향산 보기에도 신부감이 싫지 않아 ‘맞선 볼 때 한 번 보고’ 1944년 1월 4일(음력)에 신시교회에서 원대득 장로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향산과 60년 평생을 함께했던 반려자 고화일(高化一) 권사를 그렇게 해서 만났다.

    향산은 결혼과 함께 5년 만주 생활을 정리하고 귀향하였다. 따라서 향산에게 결혼은 ‘타락과 유혹’의 만주생활을 청산하도록 만들어준 돌파구가 되었다. 향산은 고향에 돌아온 후 다시 교회에 출석하며 집사직을 받았고 청년회장까지 지내면서 신앙 회복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 모든 교회 형편이 그러했던 것처럼 고향 신시교회 형편도 어려웠다. 향산은 해방직전 신시교회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김관규 목사님이 잠깐 다녀가신 후 당회장 목사가 없는 상태에서 신시유치원 선생으로 와 있다가 원산 마르다 윌슨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파송 받아 오신 양성담 전도사님이 유일한 교역자였다. 다행히 평양에 계시던 김양선(金良善) 목사님께서 신사참배 강요를 피해 신시로 피신해 오셨는데 가져오신 보물들은 원대득 장로님 댁에 보관하시고 종종 강단에서 말씀 증거도 하셨다.

    원대득 장로님은 이 보물들을 2중 벽으로 만든 골방에 보관하셨는데, 오늘의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전시되고 있는 전시물이 그때 신시에 왔던 것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훗날 양성담 전도사님은 김양선 목사님과 결혼하셨다.”

    훗날 향산은 해방직전 고향 교회에서 김양선 목사와 양성담 전도사를 만나 신앙지도를 받은 것을 두고 “하나님의 은총이었다”며 감격해했다. 위기와 절망의 상황에서 이들을 통해 들은 말씀의 은혜도 은혜려니와 김양선 목사가 수집한 교회사 및 고고학 분야의 ‘국보급’ 유물들을 직접 볼 수 있었고, 이들 귀중자료들을 수집하고 지키려 애쓰는 선배 신앙인들의 애틋한 정성과 노력을 가까이서 직접 목격하면서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만 독립운동이 아니라 파괴와 약탈로부터 우리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보존하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독립운동인 것을 깨달은 것이다. 향산의 역사자료 수집과 한국기독교박물관 설립의 꿈은 이때부터 잉태된 셈이다.


    이덕주 교수 <감신대 교수·한국교회사,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부관장, 전 기독교문사 편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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