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오직 예수의 사람, 香山 한영제 장로, 그 삶과 신앙(5)
[[제1260호] 2011년 1월 22일] 조회 : 18
해방의 감격, 그리고 월남
고향으로 돌아온 향산의 신혼 생활은 또 다른 불안의 연속이었다. 당시 태평양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러 만주까지 소개되고 있던 터였다. 향산은 ‘1925년생 2기’ 징병 대상이 되었다. 경방 단원으로 자원해서 징병을 연기시키려고도 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그와 같은 연령의 ‘1기생’들은 전쟁터로 끌려 나갔고 종종 전사 소식도 들려왔다. 그는 ‘항공병’으로 지정받았는데 2기생 ‘육군병’, ‘해군병’도 끌려 나갔다. 그 다음은 피할 수 없는 향산 차례였다. 결국 향산도 소집령을 받고 구성읍에 가서 1개월 최종 훈련을 받고 출전 준비를 하던 중 감격적인 해방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 주일만 늦었어도 태평양 어느 전선에서 ‘가미가제’(神風) 희생제물이 되었을 향산이었기에 8·15 해방 소식은 ‘복음’ 그 자체였다. 그 당시 상황을 향산은 이렇게 회고했다.
“사실 우리 집에서는 일본 패망 소식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알았다. 두 형님이 우체국에 근무하신 관계로 관공서끼리 오고가는 전보를 통해 정보를 빨리 접했던 때문이다. 일본이 패망하리란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시시각각 다가오는 징병 순간은 내게 불안이었고 두려움이었다. 따라서 해방 소식은 어느 누구보다 내게는 ‘기쁜 소식’, 복음이었다.”
해방을 맞았을 때는 향산 나이 스물하나, 한창 젊음이 폭발하던 때였다. 해방되던 날 사기면 사람들은 사기국민학교 교정에 모여 감격의 독립 축하식을 거행했는데 기독교와 천도교 연합으로 식이 이루어졌다. 교회 측에서는 김양선 목사가 연설하였다. 독립이 되자마자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자치대를 조직하고 치안 유지와 행정 보조 업무를 맡았다. 향산도 자치위원회에 들어가 석현동 흑연광에 나가 치안 상태를 점검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활기찬 곳은 교회였다. 일제 말기 감시와 탄압의 굴레를 벗고 신앙의 자유를 되찾았다. 교회를 떠났던 청년들도 돌아왔다. 일제 말기 어려운 시절 교회를 지킨 양성담 전도사와 김금년 선생, 그리고 학도병으로 끌려 나갔다가 돌아온 최용남 선생을 중심으로 신시교회 청년회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청년들의 활동은 구성 시찰뿐 아니라 평북노회까지 확장되어 평북노회 각종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향산도 내 인생의 앞날을 새롭게 계획하기 시작했다.
“확신까지는 안 되더라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목회의 길로 가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내게 있어서 해방 전 생활이 어둠이고 사탄의 길이었다면 해방 후 생활은 빛이고 진리의 길이 되어야 했다. 목회까지는 못하더라도 ‘교회 중심’의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결심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1946년 봄에 평북노회에서 경영하는 선천성경학교에 들어간 것은 이러한 결심 때문이었다. 성경학교 재학 시절 차령관교회에서 설교 대회가 개최된 적이 있는데 내가 ‘지금은 어느 때인가?’라는 제목으로 설교해 2등을 한 기억이 난다. ”
향산이 당시 평북노회 성경학교에서 만나 평생 친교를 나눈 친구로는 백낙기 목사와 방관덕 목사, 김리관 목사, 그리고 김 장로와 임경옥 장로, 노이각 장로 등이 있다. 김리관 목사(뉴욕 베다니장로교회)는 그 시절의 향산을 이렇게 회고(1995년)하였다.
“한영제 장로는 나이가 저보다 몇 해 위였지만 저는 어린아이 같았으나 한 장로는 어른스럽게 보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나이 몇 살 차이가 대단했습니다. 성경학교에서 같이 공부하고 같이 예배드리면서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때로 설교 연습도 시켰는데 한영제 장로는 설교를 매우 잘했고 그때 저는 설교를 할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장로의 설교를 듣고 앞으로 좋은 목사가 될 것이란 생각은 했었습니다.”
이러한 향산의 해방 후 신시교회와 선천성경학교를 중심으로한 신앙 열심은 ‘재회심’의 기간이었다. 그는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를 위하여’ 살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고 그렇게 되기 위해 기도하였다. 물론 거기에는 목회자의 길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원기도’까지는 못 되었지만 ‘기회가 주어지면 목회자의 길을 가겠다’고 기도하였다.
하지만 향산에게 목회자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해방과 전쟁직후 주변의 정치·경제적 상황 때문에 향산은 신학 수업을 포기하고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한 생활전선에 나서야만 했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상업과 출판업에 종사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향산은 장사를 하고 책을 만들더라도 기도 서원대로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를 위하여”라는 원칙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평생을 목회자와 교회를 위해 책을 만들고, 보급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고 그 결과 어느 목사나 신학자보다 많은 신자와 불신자들을 접하고 그들에게 복음이 담긴 책을 전달하였다. 그는 목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수없이 많은 목사들을 도와주고 격려하며, 섬기고 지도하는 ‘목사 이상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것도 초교파적으로 말이다. 그래서 향산은 훗날, 목사가 되지 못한 것에 일말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의 내용보다 더 큰 은혜로 내 길을 인도하셨다”고 회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향산의 신앙 열기가 타오르는 것만큼 박해의 정도도 심해졌다. 인민위원회, 민청이 들어오면서 자치위원회는 해체되었고 공산당 조직이 주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조여오는 공산당의 압박에 교회 청년들 중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월남’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향산과 봉형태 집사를 비롯해 안창리에 사는 이득홍 집사, 그 외에 배순직·이희경·이경섭 등 6, 7명 정도가 뜻을 모았다. 당시 아내는 첫 아이를 잉태하여 만삭인 몸으로 동행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향산은 “며칠 있으면 미군이 들어올 것이니 참고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혼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향산 일행이 고향을 떠난 것은 1947년 4월 20일경이었다. 구성읍으로 나가 도민증을 발급받고 기차로 사리원, 평산을 거쳐 제석산까지 갔다. 그 다음부터는 현지 안내인을 따라 도보로 38선을 넘었다. 도중에 배순직·이희경·이경섭은 되돌아갔고 남은 일행이 38선을 넘어 서울 영락교회 뜰에 도착한 것이 5월 2일 오후였다. 당시 영락교회에서는 천막을 치고 월남민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향산은 독신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생존을 위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덕주 교수 <감신대 교수·한국교회사,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부관장, 전 기독교문사 편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