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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장로신문] 오직 예수의 사람, 香山 한영제 장로, 그 삶과 신앙(6)

    • 관리자
    • 2011-01-27 오후 8:3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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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장로신문] 오직 예수의 사람, 香山 한영제 장로, 그 삶과 신앙(6)
    [[제1261호] 2011년 1월 29일] 조회 : 11

    월남 후의 광야 생활


    “그때엔 깡통 하나만 있어도 부자였다. 교회에서 나오는 배급 밀가루를 반죽해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깡통은 솥이고 그릇이고 식량 창고였다. 우선 급한 것이 일자리를 구하는 일이었다. 용산 미군부대 노무일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계란빵’이라 불렸던 밀가루 빵을 떼다가 회현동 고갯길을 오르내리며 팔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키 물건’ 장사도 했고 닥치는 대로 팔 만한 물건을 구해 길거리에서 팔기도 했다.”

    영락교회 독신자 천막에 숙소를 마련한 향산은 곧바로 ‘생활전선’에 나섰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혼자 월남했던 향산에게 서울 생활이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광야 생활’ 그 자체였다. 밤늦은 장충단 언덕길에서 팔다 남아 굳어버린 밀가루 빵을 찢어 입에 넣으며 눈물을 흘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 무렵 종로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변성옥, 이호빈 목사가 정규 신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을 모아 중앙신학교를 시작했는데, 향산도 월남하기 전 마음 속 한켠에 두었던 ‘목회 소명감’ 때문에 입학시험까지 치렀으나 생활 때문에 다니지는 못했다.

    향산은 자연스럽게 월남민들이 많이 나오는 영락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고향에 돌아갈 날만 오기를 기도하며 지냈다. 그 무렵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는 연고 없는 월남민들의 안식처였고 단절된 남과 북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는 연락소였다. 향산도 후에 월남한 고향 사람들을 통해 아내가 첫 아이 동숙(東淑)을 출산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고향에 남아있던 아내도 더 이상 북쪽에 있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1948년 여름 둘째 형(한영복 장로) 가족과 함께 월남 길에 올라 원산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향산은 1년 만에 의정부에 있는 월남민 수용소에 있던 아내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식구를 만난 향산은 영락교회 ‘독신 천막’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마침 그 무렵 고향 선배로 인천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원효성으로부터 “인천에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고 인천으로 내려갔다. 인천은 서울에 비하면 좀 나은 셈이었다. 항구로 들어오는 외국 물건들이 시장에 많이 나왔다. ‘홍콩 물건’으로 불리던 일용 잡화가 인기 있었는데 향산은 친구 도움으로 노점(露店)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닥치는 대로 물건을 구해 파니까 형편이 조금씩 나아졌다. 얼마 동안 가판을 하다가 한철하 박사의 손위 동서 되시는 조지선 장로님의 도움으로 쌀장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인천과 이리를 오가며 장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노점 하던 때보다 형편이 나아졌다. 그래서 탑동성당 아래 적산 판자집에 셋방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인천으로 옮긴 후에는 해방 전 용천에서 목회하던 이기혁(李基赫) 목사가 개척한 인천제일교회에 출석했다. 음악에 소질이 있었던 향산은 교회 성가 대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월남 후 어느 정도 생활에 안정을 찾아가는가 싶더니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그날은 주일이었다. 아내가 인천에서 둘째 동인(東仁)을 낳은 직후였다. 향산은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식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하여 화성군 비봉까지 갔다.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피난길을 가기란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다. “서울이 떨어졌다” “수원이 떨어졌다” “대전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식구 모두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국 다시 헤어지기로 하였다. 여자와 아이들은 그래도 살려줄지도 모르니 아내와 아이들은 인천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향산은 식구와 헤어져 걸어서 대구까지 내려갔다.

    대구에 도착하니 낙동강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로 피차에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 향산은 대구에 도착해서 곧바로 ‘호림부대’로 일컬어지던 특수 부대에 들어갔다. 이는 시흥에 있던 정보부대의 후신으로 미 8군 산하 특수부대(KLO)였다. 즉 후방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유격부대 같은 것이었다. 부대장인 김성주는 평북 강계 출신이었고 한관호, 나성준, 원시찬 등 부대 지휘관들도 이북 출신이었으며 자연히 부대원들도 이북 출신이 많았다. 6·25전쟁 전에 서북청년단 소속으로 활약했던 청년들이 많았다. 구미에서 훈련을 받는 동안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었고 공산군 후퇴가 시작되었다. 향산이 속한 1대대 3소대는 후퇴하는 공산군의 만행으로부터 민가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원주에서 태백산맥 줄기를 따라 시루봉을 넘어 퇴각하는 공산군의 동정을 살폈다.

    첫 전투는 치악산에서 벌어졌다. 치악산 산자락 동네 민가에서 소규모 공산군 패잔병들과 전투를 벌였는데 퇴각 중이던 사단 규모 공산군이 산 아래로 내려오며 일제히 공격을 가해 오히려 향산 부대가 포위되는 형국이 되었다. 결국 이 전투에서 부대는 크게 패했고 대대장과 소대장이 큰 부상을 입었으며 향산 자신도 밤새 전투를 벌이며 바로 옆에서 동료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날 밤새 전투를 벌이면서 속으로 ‘살려만 주신다면’이란 기도를 수없이 했다. ‘살려만 주신다면 주님을 위해서’ ‘살려만 주신다면 한 평생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향산은 부상 당한 대대장과 소대장을 부축하고 공산군의 추격을 받으면서 전투 현장을 벗어났다. 서울에 도착한 향산은 삼선국민학교에서 소속 없는 군인들을 모아 창설된 32연대 소속이 되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 때 기차로 부산까지 내려갔다. 부산에 도착했지만 ‘계급 없는’ 지원병들을 맞아주는 곳은 없었다. 결국 부산에 도착한 향산과 7, 8명 되는 지원병들은 ‘제대식’없이 제대한 군인처럼 각자 자유행동으로 들어갔다. 향산은 부산에 얼마 있다가 대구로 옮겼다. 그리고 거기서 미8군 통역관으로 있던 고요열(해방 전 평양신학교 교수로 있던 고려위 박사의 아들)의 주선으로 미8군 노무단에 들어가 서울과 지방의 토목공사 현장을 다녔다. 그 사이 인천에 남겨 두었던 아내와 가족은 1·4후퇴 때 부산을 거쳐 제주도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향산과 연락이 닿아 부산에서 재상봉한 후 온 가족이 대구 대명동 피난민 수용소에 입주하면서 본격적인 ‘피난생활’이 시작되었다. 바로 그곳에서 향산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이덕주 교수 <감신대 교수·한국교회사,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부관장, 전 기독교문사 편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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